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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명나는 정구장!!

  • 다시 한 번 KOREA!!


소프트테니스 역사 ㅣ 한국 소프트테니스 100년, 앞으로의 100년을 위해!!


개화기의 청년 정치가 김옥균선생에 의해서 1883년 일본에서 도입되었다는 설에 따른다.

본래 정구의 연원은 구미의 테니스에 있다. 그 연원을 보면 테니스의 도입부터 들어가야 한다. 정구(여기는 테니스 성격이 짙음)의 처음 이름을 척구라고 하였다. 우리나라 처음 도입 시기는 많은 설이 있으나 그 중에 개화기의 청년 정치가 김옥균 선생에 의하여 1883년 일본에서 동입 되었다는 설에 따른다. 수신사 일행을 수행하여 도일한 선생은 개화 문명의 길을 걷고 있는 일본을 보고 경응의숙에서 복택유길(일본 정구의 창설자)와 탁지부(전 경제 기획원 자리)에 코트를 닦고 외교관들을 상대로 경기를 한 기록이 있다. 이때 이름을 척구라 하였다. 우리 고유의 척서라는 윷놀이에서 딴 '공던지기'라는 의미이다.


이때에는 물론 테니스(Lawn tennis. 경식정구)였으며 일본에서 연식화되기 2년 전의 일로서 삼일천하로 끝난 선생의 정치 망명으로 척구는 소멸된다. 그러나 우리 손으로 도입된 최초의 스포츠라는 점은 간과할 만하다. 우리나라 공식적으로 정부에 언급된 것은 1885년 러시아 공사관에서 위로차 어전 테니스 경기가 벌어졌는데 "저선 땀흘리는 일을 하인배에게 시킬 일이지"하고 고종 황제는 냉담한 반응을 표시하였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는 당시의 지도층이 스포츠에 대한인식을 나타내주는 일화로서 처음 테니스는 외교관 교제용으로 사용되었으며 이 시대는 노동과 스포츠가 동일시되던 시기였기도 하다. 정구의 종주국인 일본의 공식적인 기록으로는 미국인 체육교사 라란드씨(G.A LELAND)가 일본 근데 체육교육의 본 고장인 체조 강습소(동경고사의 전신)교사로 부임해 올 때 테니스 용구를 지참, 지도하였다고 되어 있다. 라란드씨가 이후 전국으로 전국사범학교 학생을 위하여 고무공을 사용하였으니 즉 우리 연식정구의 기원 원년이 되었던 것이다. (일본은 1984년을 정구 역사의 100년이 되는 해로보고 있다. 그리고 일본 정구협회는 1924년에 설립) - 1890년 도쿄 고등사범학교(현 동경교육대학교)의 즈보이 교수가 부드러운 공을 창안하여 보급했다는 설도 있음. 그러던 것이 1895년에 대만에 그리고 1905년에는 조선에도 정구가 상륙하게 되었다. 우리나라의 정구 전례는 1876년 병자수호 조약 이후 개방된 부산, 친천, 원산 3개 항구도에 서양교육 형태의 소학교, 상업학교가 생기게 되고 자영 정구의 발생지가 되었다. 1905년 러일 전쟁에 승리한 일본이 통감부를 설치하고 내정 간섭을 하게 되니 한성(서울)에도 일본 관현이 점차 늘어났고 한국 정부에도 고문이라는 명목의 실권자가 배치되니 이들을 중심으로 정구 전수의 역할을 하게 되고 은행회사와 각 학교가 신설(한성사범, 한성고보, 선린상업)되고 곳곳에 코트가 생긴 것이다. 그리하여 정구의 기원은 공식적으로 '1905년'이다. 그리고 공식적으로 조직을 결성한 것은 1908년 4월 18일 지금의 재무부에 해당하는 탁지부의 일반 관리들이 친목을 위한 회동구락부-일명 관인구락부를 조직. 바둑, 장기,궁사,정구 등의 시설을 갖추고 이듬해 5월 2일 미창통 정구 코트에서 여흥식경기회를 개최한 것이 정구 경기 대회의 시조이다. 이때 여흥이란 지금의 스포츠를 뜻하는 말인데 일종의 노름(여흥의 본뜻)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이들은, 봄,가을 2회에 걸쳐 정구대회를 실시하였다. 1910년에는 농상공부의 직원들도 성계구락부를 만들었으며, 기록상 최초의 공식경기는 1911년 10월 25일에 있었다. -용산철도정구부 추계대회 철도 코트 (1911년 10월 25일) 왜성구삭부, 한국은행, 영림창, 동양척식회사, 일삼공은행, 총독부 중학교, 동양협회 등이 참가. -제1회 경룡정구대회 경성일보 주최로 1911년 11월 5일 청산 코트에서 경성일보사가 우승기를 제공하여 개최함으로써 뿌리를 내리기 시작하여 크고 작은 대회가 정기적으로 개최되었다. 이때 용산철도군 우승 -경성보이스의 창립과 대회 경성선수중심(용산 외) 1912년 3월 2일 제 1회대회를 개최하고 매월 개최 연 12회의 대회를 개최. 본격적으로 정구대회가 활기를 띠기 시작하였다. 정구가 1905년 이후로 번성하게 된 이유는 우리도 일본을 본받아 개화를 하자는 욕구가 충만하였던 것이 스포츠에 표현이 되었던 것이다. 학교 제도의 확립으로 교사의 지도를 통한 보급이중추가 되어 신문화의 일종으로 스포츠는 청년층에 환영을 받았다. 그러나, 일본에 호응을 하자는 것은 아니었다. 우리 민족의 지식의 생산지였던 오산학교를 위시하여 이때 전국 각지에 상당수 설립되었던 소중학교나 전문학교가 모두 정구를 채택하였다. 당시 가장 탄압 받고 반일 운동이 강성하였던 평안북도를 비롯한 전국 각지에서 정구에 대한 열의를 가지고 있었다. 심지어 대구에서는 당시 영남에서 유일한 반일 청년 운동가였던 서상일씨(조양청년회장)가 대회 주최까지 하였따. 그밖에 개신교, 장로교 및 YMCA, 불교계에서도 전국 각지에 학교를 설립하면서 정구를 채택하였다.

1916년에는 경성의 17개 군소 정구단체가 전경성 정구구락부를 조직 하였으며,

1919년 10월에는 조선체육협회 주최의 전조선 정구선수대회가 개최 되었고 체적으로 1921년 10월의 제 1회 조선정구대회는 청년단 9개팀, 중학 9개팀(현 고등부)이 참가하는 대 성황을 이루었다. 제 8회 암스텔담 올림픽이 개최된 해인 1920년 5월에 정구 단체의 시초인 조선정구협회창립 되었다.
1921년 10월 15일 부터 17일까지 3일동안 동아일보 후원으로 반일적인 도시로 이름난 개성의 진성고진 코트장에서 '우리 민족의 손으로 이룬 첫 대회'로 역사적 의의를 가지면서 9개팀이 참가한 청년단과 8개팀이 참가한 중학단이 모여서 매년 실시하였다. 1923년 6월 30일에 정동 제일여고(현재의 경기여고)코트에서 개최된 전국여자정구대회(동아일보 주죄)는 당시 경성 인구가 25만 명중에 2만명이 관전하는 대성황의 경기였으며 사회여건상 남성금기 하에 이루어지지 더욱 관심을 끌었다. 많은 기관 사회 단체들의 영향으로 다시금 1933년에 조선연식정구연맹이 발족 되어 제 1회 전조선연식정부선수권대회를 개최하였는데, 약 200여명이 출전한 이 대회는 중등부, 전문부, 일반부로 나누어서 실시하였다. 같은 해 10월 일본에서 열린 제 7회 메이지 신궁대회에 출전하여 전문부에 보성전문학교(현 고려대학교)의 우이근, 누병익, 조가 일본의 중앙대학 나카네 시노하라 조 경승에서 4:0 으로 이겨 우승하였고, 일반부에서 최영생, 권복인조를 비롯한 5개조가 출전하여 결선에서 일본 대판(오사카)팀을 4:1로 이겨 각각 우승하였다. 또한 1934년 8월 동경에서 개최된 전일본정구대회 중등부, 일반부에서 우승하였고, 이듬해 8월 전일본 선발군이 내방하여 전경성군과 대전하여 다시 우리나라가 우승하였다. 이어 1935년 10월 제 8회 메이지 신궁대회부터 제 13회까지 우승하는 등 연 10년을 계속 제패하여 정구 주종국인 일본을 각성케하고 더불어 민족항일기의 암울한 시대에 일본의 땅에서 일본을 압도 조선인의 힘을 보여준 기회가 되어 우리 민족의 역량을 드높였다. 그러나, 초기의 우리나라 정구는 큰 활기를 띠었으나 1942년 일제의 구경기폐지정책으로 광복 때까지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지금까지 해방전의 한국 정구사를 통상 다음과 같이 구분한다.

1. 초창기 1095년 - 1919년 : 도입과 뿌리 형성기
2. 정착기 1920년 - 1930년 : 확대기
3. 개화기 1931년 - 1945년 : 성숙기

드디어 광복과 함께 1945년 10월 1일에 옛 조선연식정구협회의 전통을 받아 조선정구협회가 새로이 조직 되고 산하에 연식부와 경식부(테니스)를 둠으로써 새롭게 출발 하였다.


1948년 8월 정부수립으로 조선연식정구협회를 대한연식정구협회로 개칭하고, 1948년 9월에 대한체육회가 가맹을 하였다. 1953년 9월에 대한테니스협회와 완전 분리하였고 1955년 7월 26일에 아시아정구연맹에 가입하였다. 아시아 연맹이 결성되자 한국, 일본, 대만 3국을 중심으로 1956년 10월에 중화대북, 대북시에 제 1회 대회를 시작으로 1973년 9월 한국, 대전에서 개최된 제 9회 대회까지 2년 주기로 아시아정구대회를 개최하여 아시아 지역에 정구를 홍보, 보급시키는데 비중을 두었다. 그러던 것이 좀더 세계적인 창립 회원국으로 가입하였다 (북한은 1992년 9월에 회원국으로 가입) 미국 하와이에서 개최된 1975년 제 1회 세계선수권대회에서 단체전에서 여자부 우승, 남자부 준우승, 개인전에도 여자부가 복식 1위, 2위를 차지하면서, 그 뒤 2년마다 열리는 이 대회에서 계속 상위의 성적을 올렸다. 협회는 1962년 9월 서울, 제 4회 대회, 1967년 9월 제 6회, 마지막 대회인 1973년 대전에서 개최된 제 9회 대회 등 3건의 아시아선수권대회와 1979년 8월 대구에서 개최된 제 3회 대회, 1987년 8월 서울에서 개최된 제 7회 대회, 1991년 서울에서 개최된 제 9회 대회 등 3건의 세계선수권대회를 개최하는 등 정구 발전에 일익을 담당하였다.

그리고 1988년 2월 5일에 아시아연맹 재 창립되자 회원국이 되었다.

과거의 영광을 되찾기 위한 노력으로 고 조정순 회장(94년 작고)을 중심으로 협회를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국제 대회 유치 및 국제연맹회장으로 취임(87년) 중흥에 나섰다. 1989년 1월에 침체된 정구를 다시 중흥 시키기 위한 발판으로 명칭을 테니스와 분리된 개념인 '대한정구협회'로 명칭을 개칭하면서 영문으로는 'KOREA SOFT TENNIS ASSOCIATION (양칭"KSTA")이라 하며 사무소를 서울특별시 송파구 오륜동 88번지에 둠을 명시하였다.
그리고, IOC와 함께 국제스포츠 양대 기구인 GAISF에 1933년 필란드에서 개최된 제 27차 GAISF총회에서 정회원국으로 가입하여 정구가 국제무대에 본격적으로 활동하게 된 계가기 되었다. 이후, 세계의 유수 스포츠 연맹과 교류를 통하여 정구를 홍보 및 국제화, 그리고 올림픽 종목 채택을 위하여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갔다. 북한은 국제연맹에 1992년 9월에 가입을 하였으며 1996년 방콕에서 개최된 제 3회 아시아 정구선수권대회에 출전을 하여 모처럼 해방 후 남북한 정구가 한마당에서 뛰어 아시아 참가국들의 큰 관심거리가 되기도 하였다. 북한 선수단에 의하면 평양체육대학에서 선수당 약 70여명(남자 40여명, 여자 30여명)의 선수가 활동 중에 있으며 2000년 올해 초 역시 평양 체육대학내에 코트를 새로 정비하여 생활체육으로도 준비중에 있다고 한다.